여행 - 국외/체코 ; 프라하
모라비아 비밀 정원
경인생
2016. 1. 6. 13:36
체코 모라비아의 비밀 정원
더 트래블러 류현경 입력 2015.12.31 14:48
오랜 세월 유럽 명문가의 휴양지로 꼽혀온 아름다운 성과 정원의 도시들. 크로메르지시와 레드니체-발티체 문화경관에서 옛 귀족들의 놀이터를 찾았다.

크로메르지시가 자랑하는 플라워 가든. 높이 올라가 구경할수록 감탄사는 더 커진다.

레드니체 성에서 호수를 향해 걷다보면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크고 작은 놀이터가 끊임없이 나타난다.

발티체 성에서 만난 발랄한 영혼의 소유자들. 카메라를 들이대니 바로 자세가 나온다.
파티가 한창인 바로크풍의 고급 저택 앞. 다급히 뛰어나온 미모의 여인이 주변을 잠시 살피더니 드레스 끝자락을 움켜쥔 채 정원으로 내달린다. 왼쪽, 오른쪽, 또 왼쪽, 오른쪽, 열심히 방향을 꺾어가며 미로 같은 정원을 얼마쯤 달렸을까, 수풀 속에 숨어 있던 커다란 손이 여인의 가는 허리를 낚아챈다. 그리고 암전. 안타깝게도 정확한 영화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식의 장면이나 비슷비슷한 이미지들이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셀 수 없이 많이 등장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공작새의 깃털 장식이나 보석 반지, 황금빛 새틴 드레스보다 더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했던 건 동화책 너머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미로의 정원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런 정원에 와 있다. 크로메르지시에서 보낸 반나절은 계속되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참 호사스럽게도 살았구나’ 싶을 만큼 널찍하게 조성된 영국식 정원. 철마다 바뀌는 꽃과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 나무들의 조화는 다소 현실감이 없어 보일 만큼 단정하고 눈부셨다. 바로크 양식의 대저택 같던 성의 내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장까지의 높이만 대략 16미터에 달하는 강당에 서면, 육중한 샹들리에와 금빛 벽면 장식의 향연에 그야말로 압도되고 만다. 더욱 놀라운 건, 이 모든 게 황제도 대부호도 아닌 주교의 소유물이었다는 사실이다. “15세기 올로모우츠의 주교 스타니슬라프 투르조Stanislav Thurzo가 이곳에 자신의 성을 재건하며 과수원과 텃밭, 꽃밭으로 이루어진 정원을 함께 설계했어요. 여긴 주교의 지배하에 있던 땅이었거든요. 그게 크로메르지시 성과 정원의 시작이었죠. 이후 주교가 바뀔 때마다 도시도 조금씩 바뀌고 정원이나 성의 모습도 달라졌어요.” 가이드는 설명 끝에 부러움 섞인 웃음을 보탰다. 주교가 성직자라기보다 귀족으로 존재하던 중세 유럽에서, 크로메르지시는 먹고 놀고 쉬면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곳, 그들을 위한 일종의 디즈니랜드였다. 크로메르지시의 정원이 정갈한 영국식이라면, 오스트리아와의 접경 지역인 레드니체-발티체 문화경관Lednice-Valtice Cultural Landscape은 좀 더 화사하고 풍성한 낭만주의적 기운이 엿보인다. 보통 이런 분위기는 그 땅을 지배하는 이들의 성향에 따라 갈리는데, 일대의 오랜 주인은 바로 수세기에 걸쳐 부유한 유럽 명문가의 대명사로 불리던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가문. 13세기 중반 레드니체에 처음 들어온 이들은 1세기 만에 이웃한 발티체까지 영지로 삼아 자신들만의 파라다이스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레드니체 성은 여름 별장, 주요 거주지는 발티체 성이었다. 실제 ‘귀족의 별장용’으로 꾸민 많은 장소가 그러하듯 발티체 성보다는 레드니체 성이 한결 화려하고 장식적이었다. 오크 나무 하나를 8년간 조각해 만든 도서관의 둥근 계단부터 대리석 한 덩어리를 그대로 깎아서 만든 욕조까지, 과연 ‘체코의 베르사유’란 수식어는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여정의 백미는 2개의 성 사이로 조성된 156헥타르 규모의 거대한 정원. 마차나 보트를 타고 호수로 둘러싸인 정원을 헤매다보면 그들이 사냥 중 휴식을 취하거나 유흥을 즐기던 온갖 형태의 파빌리온이 수시로 눈에 들어온다. 특히 재미있었던 건, 도무지 주변 경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슬람식 뾰족탑 미너렛minaret이었다. 원래 인근에 땅을 매입해 성당을 짓고 싶었으나 개신교도인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자 “그럼 내 땅에선 내 맘대로 하겠다”며 홧김에 쌓아올린 탑. 뭐든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18세기 유럽 최고 명문가 귀족의 유치함 덕에 간만에 허리가 꺾이도록 웃었다. 현재 크로메르지시의 정원과 레드니체-발티체 문화경관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중세 모라비아를 지배했던 귀족들의 놀이터. 남의 놀이터를 헤집는 경험은 유쾌했지만, 이런 삶이 결코 당연하지 않은 현실로 돌아올 수 있어 다행이었다. 역시나 꿈은 꿈꾸는 순간이, 여행은 여행하는 순간이 가장 영화 같은 법이다.

안뜰에 들어서기만 해도 크로메르지시 성의 내부 규모가 대충 상상이 간다.

크로메르지시 성은 당대 건축과 디자인, 기술의 집약체였다.

여름 궁전인 레드니체 성 내부.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남성들을 위한 홀이다.

발티체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이 거대한 성이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주요 거주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