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계 사/그리스

알랙산더 대왕

경인생 2014. 3. 21. 18:03

짧았지만 굵었던 10년의 삶 [ 1 ]    2014/03/14 09:09 추천 1    스크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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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의 軍史世界

 

짧았지만 굵었던 10년의 삶 [ 1 ]

 

 

 

카이사르를 부끄럽게 만든 자

 

고어 비달의 소설 '율리아누스'를 보면 눈물을 흘리는 카이사르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로마의 권력을 잡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것인데, 불과 29살에 세계를 정복하였던 한 인물과 자신을 비교하며 무능함을 자책하는 장면입니다.  이처럼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카이사르조차 초라하게 느끼도록 인물이 바로 대왕으로 불리는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the Great, BC356~BC323)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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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두상 ]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라고도 불리는 그는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세 대륙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는데, 대륙으로 표현하니 어마어마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가까이 있는 그리스, 이집트, 페르시아를 정복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서양사에서 그때까지 등장한 나라 중에서 최대였습니다.  한마디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알고 있던 문명 세계 모두를 정복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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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대륙에 걸친 알렉산드로스가 지배하였던 제국의 강역 ]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엄청난 대업을 불과 10년 만에 달성하였다는 것입니다.  10년은 고사하고 정복자 당대에 세계를 지배한 제국을 만든 경우도 세계사에서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자마자 그렇게 거대했던 제국이 순식간 분열되어 사라졌는데, 이것도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계승자라고 자처하였지만 그 어느 누구도 알렉산드로스가 이룩하였던 업적을 유지하지는 못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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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제국은 순식간 만들어졌지만 홀연히 사라져갔습니다 ]

 

결론적으로 알렉산드로스가 활약한 시기는 단지 10년에 불과하였지만 고대 역사의 상당 부분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을 만큼 그의 위상은 실로 거대했습니다.  그의 등장 후에도 그리스의 역사는 있지만 그의 죽음이후 그리스에 대한 언급을 끝내고 시공을 훌쩍 뛰어 로마로 넘어가는 역사서가 대다수입니다.  그 만큼 짧지만 강렬하게 역사에 흔적을 깊게 남겨 놓았고 아직까지도 잔영이 내려올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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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개 역사서는 그의 사후 그리스에 대한 언급을 끝내고 로마로 넘어갑니다 ]

 

그러한 알렉산드로스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지치지 않는 정복자라고 표현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계속된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의 진출을 가속화했습니다.  만일 33세에 요절하지 않고 부하들의 동의도 얻었다면 더 많은 세계를 향해 진군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팽창이 중단된 이유 중 하나가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지만 장기간의 원정에 지친 병사들이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불만을 표출하고 반대하였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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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은 그야말로 쉼이 없었습니다 ]

 

그가 재위 13년 동안 무려 10년을 원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사명감이었습니다.  기원 전 5세기에 있었던 페르시아 전쟁은 당대 초강대국인 페르시아의 침략을 그리스 연합군이 막아내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침략자를 격퇴한 것뿐이지 만사의 근원인 페르시아는 그대로 건재하였습니다.  결국 페르시아를 제거하지 않고 항구적인 안정은 요원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서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전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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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는 수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의 침략을 격퇴하였지만
항구적인 안전을 확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

 

폴리스들은 외적의 침입에 일치단결하여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 그들끼리 싸우면서 날을 새는 경우가 더 많았고, 오죽하면 올림픽 기간 중에 강제로 휴전하는 풍습까지 생겼습니다.  당대 수사학자인 이소크라테스는 동족끼리 치고받는 현실을 개탄하고 그리스를 통일할 강력한 군주의 등장을 희망하였을 정도였습니다.  그동안 고만고만한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가 돌아가며 그리스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였지만 통일은 요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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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통일에 나선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 ]

 

그러던 그리스 세계를 통일하고 페르시아를 정벌할 원대한 야심을 가진 자가 역사에 등장하였는데, 그가 바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입니다.  북방에 위치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계지만 오랫동안 변방으로 취급받았고 심한 경우 야만인으로 비하되기도 하였습니다.  국제 정세에 밝았던 필리포스 2세는 강력한 개혁을 단행하여 마케도니아의 국력을 키웠고 아테네와 테베 연합군을 격파하여 마침내 그리스를 하나로 묶는데 성공하였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짧았지만 굵었던 10년의 삶 [ 2 ]    2014/03/18 09:07 추천 2    스크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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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의 軍史世界

 

짧았지만 굵었던 10년의 삶 [ 2 ]

 

 

 

반격의 칼을 뽑다

 

하지만 필리포스는 권력 암투 중 독살당하면서 생을 마감하였고 그의 유지는 불과 20세에 불과한 아들 알렉산드로스에게 이전되었는데 그때가 기원전 336년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고 부왕의 의지를 잘 알던 알렉산드로스는 사실 필리포스보다 훨씬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부왕의 죽음을 통해서 내부의 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지 않는 한 대업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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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는 불과 20세에 권력을 이양 받습니다 ]

 

그는 즉위하자마자 왕위를 노릴 수 있는 자들을 암살하거나 일거에 무력화시켰는데, 이러한 피바람은 일가친척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권력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모든 이들이 비명 속에 사라져 갔습니다.  그는 젊었지만 권력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당대의 대학자들에게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고 문화를 숭배하는 태도는 남달랐지만 권력은 잔인한 방법으로 공고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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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대 석학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교육을 받는 알렉산드로스
하지만 권력은 무자비한 방법으로 공고히 하였습니다 ]

 

이처럼 마케도니아가 내홍에 시달리는 동안 굴복하고 있던 많은 폴리스들이 반기를 들었는데 아테네, 테베, 테살리아가 대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빠른 시일 내 내치를 안정시킨 알렉산드로스는 즉시 이들의 제압에 나섰고, 특히 끝까지 저항하던 테베는 완전히 파괴되고 시민들은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에서 반항 세력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부왕 당시부터 꿈꾸었던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는데 그때가 그의 나이 22살인 기원전 334년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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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알렉산드로스는 통일 그리스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원정에 나섭니다 ]

 

이것은 지난 세기이후 쉼 없이 그리스를 괴롭혀 왔던 페르시아에 대한 복수극이었는데, 우리 역사를 반추하면 상당히 부러운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대첩처럼 우리도 역사에 길이 빛나는 대승이 있었지만 사실 우리 땅을 침략한 외적을 물리쳐 낸 소극적인 승리였습니다.  그리스처럼 복수를 위해 혹은 징벌을 위해 우리가 원정을 가서 상대를 완전히 굴복 시킨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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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도 그리스처럼 침략자를 물리친 역사는 많지만
알렉산드로스처럼 원정을 가서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킨 적은 없습니다 ]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서쪽 변경인 소아시아로 건너가 이오니아 일대의 폴리스들을 해방시켰고 곧바로 시리아를 공략하였습니다.  위협을 느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방어에 나섰으나 이수스에서 대패하였습니다.  이 둘의 충돌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기원전 100년경에 만들어진 폼페이 벽화 속에 자세히 묘사되었을 정도입니다.  그 여파는 대단하여 중간에 위치한 많은 도시들이 차례대로 항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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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스 전투를 묘사한 유명한 폼페이 벽화 ]

 

이때부터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 3세는 장장 3년에 걸친 혈전을 벌였는데, 그것은 동서양 두 문명 세계의 격렬한 충돌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소아시아를 거쳐 남하를 계속한 알렉산드로스는 격렬하게 저항하는 티레와 가자를 차례대로 정복하였습니다.  굴복시킨 적들에게 대체로 관대했던 알렉산드로스가 격분하여 점령 후 남성들은 대부분 처형하고 아녀자들은 전부 노예로 팔아버렸을 만큼 그리스 연합군의 피해도 막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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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로 항복한 적에게 관대한 편이었지만 

경우에 따라 무자비한 탄압도 있었습니다 ]

 

이렇게 팔레스타인을 제패한 알렉산드로스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로 향하였습니다.  이곳은 페르시아 제국의 최남단으로 아프리카, 지중해, 아라비아 일대의 물산이 집결하는 통상의 중심지였습니다.  따라서 이집트를 확보하면 페르시아는 많은 힘을 잃는 반면 그리스는 에게 해를 내해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페르시아의 강압 통치에 시달리던 이집트인들이 알렉산드로스를 해방자로 대하면서 정복은 손쉽게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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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를 해방시키며 아프리카에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

 

알렉산드로스는 나일강 하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고 아몬 신전을 참배하였습니다.  여기서 신의 아들임을 신탁 받으면서 오리엔트의 최고 지배자로 공인되었습니다.  이처럼 뜨거운 환대를 받은 그는 스스로 귀부한 이집트인들에게 자치를 허락하고 매우 관대하게 대하였는데, 이때부터 그는 만인동포관(萬人同胞觀)을 지니게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제 남은 곳은 페르시아 본토였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짧았지만 굵었던 10년의 삶 [ 끝 ]    2014/03/21 08:37 추천 1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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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의 軍史世界

 

짧았지만 굵었던 10년의 삶 [ 끝 ]

 

 

 

아직도 남겨진 거대한 흔적

 

이집트 정복 과정은 상당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일견 알렉산드로스가 끝까지 저항한 이들을 잔혹하게 처단하고 노예로 팔았기 때문에 인정사정없는 정복자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피지배자가 된 이들을 마케도니아인과 차별 없이 대하고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70개나 건설하였을 만큼 자신의 이름을 걸고 민생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그는 뛰어난 군인이면서도 노련한 정치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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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정복지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하여 만생을 살폈습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상상도) ]

 

그는 호메로스의 시를 항상 애독하였고 원정 때도 학자를 대동하고 다녔을 정도로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습득하는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또한 그리스와 정복지의 문화를 곳곳에 전파하는 역할도 담당하였습니다.  따라서 그가 죽은 후에 제국은 분열되었지만 후계자임을 자부하는 자들이 여기저기에서 등장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민심을 잃었다면 굳이 후임들이 그의 이름을 들먹일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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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사후 많은 이들이 후계자임을 자처하였을 만큼
알렉산드로스는 민심을 장악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

 

이집트를 정복한 후, 이제 남은 곳은 페르시아의 본토뿐이었습니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는 말 머리를 돌려 공략에 들어갔습니다.  티그리스 강 동쪽 가우가멜라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다리우스 3세와 결전을 벌였습니다.  다리우스 3세는 이수스에서 당한 치욕적인 패배를 복수하려 하였지만 이번의 패배는 더욱 참혹하였습니다.  한때 세계를 지배하였던 페르시아는 몰락하였고 그 자리를 이제 알렉산드로스가 차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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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시아가 알렉산드로스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습니다 ]

 

다리우스 3세는 몇 달 뒤 신하였던 박트리아의 왕 베소스에게 살해당했는데 주검을 거두어 정중하게 장사를 지낸 인물은 동방의 새로운 샤에 오른 알렉산드로스였습니다.  그는 그리스의 왕이자, 이집트의 파라오였으며 페르시아의 샤를 겸임한 지구상 최대의 권력자가 된 것이었고 그때 알렉산드로스의 나이는 불과 26살이었다.  모든 이들은 아버지 때부터 생각하던 대업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의 정복 전쟁은 이제 끝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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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의 주검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

 

이제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금의환향하는 일만 남았는데 정작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9년 봄, 동쪽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때부터는 순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지만 장기간 원정에 지친 그리스군이 명령을 거부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력을 페르시아를 비롯한 동방의 속민들로 편성하여 원정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이점은 많은 내용을 암시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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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는 명분이 있는 그리스군의 철군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권력자였지만 명분 없이 국정을 농단하지 않았습니다 ]

 

먼저 알렉산드로스가 세계의 지배자였지만 마음대로 국정을 운용할 수는 없었다는 뜻입니다.  오랫동안 내려오던 그리스의 민주적인 관행과 독립적인 폴리스들의 역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기에 그리스군의 단독 철군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처음 원정 당시에 최종 목표였던 페르시아를 정복하였으므로 더 이상 군대를 동원할 명분이 사라져 버린 셈이었고 이에 따라 알렉산드로스도 철군을 막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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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의 속주민들로 구성 된 군대를 이끌고

인도까지 다가갔지만 더 이상 앞으로 갈수 없었습니다 ]

 

반면 아시아인들이 새롭게 그의 군대에 편입되었다는 것은 피지배지역에 대한 차별적 통치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본인 또한 포로가 된 박트리아 왕의 딸과 결혼하고 부하 병사들에게도 현지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는 등 유화책을 동시에 구사하면서 민심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인더스강까지 이르렀을 때 더 이상 앞으로 나가려 하던 이들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너무 멀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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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강력했던 제국은 그의 사후 곧바로 붕괴되었습니다
하지만 간다라 미술처럼 그 잔영은 지금도 흔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

 

원정은 끝났고 그는 바빌론을 수도로 삼아 제국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기원전 323년 6월 1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위 기간 13년 중 10년을 원정으로 보냈을 만큼 장기간의 전투에서 얻은 질병 때문이었는데, 당시 나이가 33세여서 후계 구도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가장 강력하였던 새로운 제국은 곧바로 붕괴되었습니다.  그는 세계사에서 가장 강렬한 자국을 순식간 남기고 홀연히 떠난 거인이 되었습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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