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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햇빛을 받아 더욱 명료해지고, 신화와 전설은 달빛을 받아 구전된다는 말이 있다. 역사는 양(陽)이고 신화와 전설은 음(陰)이라는 의미다. 양과 음은 상호보완적이고 호혜적이다. 어느 하나만 있으면 안 된다. 이 세상의 이치다.
그리스는 신화의 땅이자 전설의 땅으로 통한다. 수많은 역사가 있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역사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신화를 밝혀내면 낼수록, 햇빛을 받을수록 더욱 명료해져 역사가 될 확률도 높아진다. 그 연결고리를 찾는 작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의 핵심 유적지인 올림픽 성화 채화지인 올림피아(Olympia)를 조용헌 박사의 동양학적인 설명을 곁들여 소개한다.
붕괴된 채로 남아 있는 제우스 신전 바로 뒤에 헤라 제단이 있다. 여기서 4년 마다 열리는 올림픽의 성화를 채화한다.
올림픽 성화 채화지인 올림피아로 향했다. 길 주변엔 편백나무 같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나무들이 유난히 많다. 가는 곳마다 군락을 이루고 있다. 편백나무가 아니고 ‘사이프러스’라 불리는 측백나무다. 십자가를 만들던 나무로 알려져 있다. 주로 묘지 주변에 근처에 이루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예로부터 부활을 믿으며 사후세계를 따로 두지 않았다. 현세와 전생이 공존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공동묘지는 항상 마을 바로 옆에 있다. 공동묘지를 친숙한 놀이터로 여겼다. 공동묘지가 음이고 죽은 자가 음이라면 역시 음과 양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공동묘지에 매장된 시신은 3년 뒤에 다시 뼈를 수습해서 화장하고 난 뒤 납골당에 영원히 봉안한다고 한다. ‘사이프러스’는 공동묘지에 묻힌 시신이 하늘의 신비스런 영령을 받는 매개체로 여겨진다. 그래서 삼각형으로 하늘을 향해 끝없이 자라는 측백나무를 통해 영령을 받아 시신이 부활한다고 믿는다. 그리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나무가 측백나무다.
헤라제단에 있는 성화 채화 안내판.
최고의 신 제우스(Zeus)를 모셨던 성역 올림피아에 다다랐다. 올림피아는 올림픽 성화 채화지이기도 하지만 고대 올림픽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한 곳이다. 조용한 동네다. 분위기 자체가 사람을 안정되게 한다. 여기서 고대 올림픽을 개최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으로 짐작된다. 그리스는 기본적으로 도시국가다. 수많은 도시국가가 서로의 영토보존과 생존을 위해서 전쟁을 치렀다. 고대 올림픽은 각 도시국가에서 선발된 선수들과 관람객의 안전을 위해서 대회 기간 앞뒤 3개월 동안은 전쟁을 중지했다. 즉 고대 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라기보다는 하나의 평화 행사였던 셈이다. 올림픽 때는 각 도시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달리기를 중심으로 멀리뛰기,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레슬링, 승마, 복싱, 전차경기 등의 종목에서 기량을 겨뤘다. 뿐만 아니라 시와 음악까지 콘테스트를 했던 일종의 종합문화행사였다.
최고의 신 제우스의 모습이 있던 장소에서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다.
출전선수들은 전부 나체였다. 서양의 나체숭상문화의 발원지가 바로 그리스이고, 올림픽이었던 것이다. 신(神)도 나체로 형상화 돼 있다. 나체는 강인한 체력을 가진 자만이 보여줄 수 있다. 고대 올림픽은 어쩌면 뽐내고 싶은 인간 욕구를 발현하는 장이었는지 모른다. 조용헌 박사는 “나체는 신과 인간의 평등을 전제로 하고, 모든 것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솔직한 게 여과 없이 드러나거나 지나치면 음탕한 것이 되지만….
올림피아 박물관에 있는 최고의 신 제우스의 모습.
조 박사가 주변을 한껏 둘러보더니 말을 꺼낸다.
“이곳은 전쟁을 하라고 해도 못할 동네입니다. 분위기가 사람을 안정되게 합니다. 명당 중의 명당입니다. 지형을 가만 보니 하나의 산을 중심으로 두 강이 만납니다. 물과 불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그 정중앙에 제우스 신전이 있습니다. 지형과 건물구조를 볼 때 핵심이 제우스신전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우스신전을 둘러싸고 있는 나머지 건축물들은 부속건물입니다. 아마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이러한 지형을 감안해서 올림픽 개최지를 이곳으로 정하고, 전쟁을 중단하면서 경기를 치른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올림픽은 일종의 평화조약이었던 것이죠.”
고대 올림픽이 열렸던 스타디움 입구.
두 강은 클라데오스(Kladeos)와 알페이오스(Alpheios)며, 한 개의 산은 크로니온(Kronion)이다. 올림피아의 중심지, 즉 제우스 신상(神像)은 산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끝닿는 지점과 두 강이 만나는 지점의 중간쯤에 있다. 대충 눈가늠만으로도 짐작이 가는 거리였다. 절묘한 위치에 제우스 신상과 올림픽 성화채화지가 자리 잡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과 신의 균형뿐만 아니라 자연의 음과 양의 균형도 감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동양의 풍수가 그대로 적용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조용헌 박사가 참가자들에게 서양문명에 관해서 동양학으로 설명하고 있다.
조 박사가 말을 이었다. “한국의 두물머리를 생각하면 됩니다. 한강의 두물머리가 얼마나 경치가 아름답고 명당입니까. 그런 장소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웰링턴 국립묘지도 물이 감아 도는 곳입니다. 대개 합수지역이 중요하고 명당입니다. 고대로부터 물이 중요했기 때문이죠. 이런 지역은 먹을 것이 풍부하고 사람을 안정되게 합니다. 거친 분위기나 살기(殺氣)가 전혀 없습니다. 올림픽 개최지로 선택된 이유를 알법합니다.”
올림피아 신전은 기원 전 지진으로 1차 파괴되고, 뒤어어 수해와 기독교에 의해 파괴된다.
신전이나 건축물 곳곳에 사자조형물이 있다. 동양식으로 하자면 용이나 호랑이 정도 되겠다. 동양에서 용과 호랑이라면 그에 대비되는 서양 동물은 바로 사자다. 사자가 있는 곳은 대개 권력이 있고, 물이 있다. 물은 황제의 권능만큼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는 동서양 막론하고 같은 이치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왕의 자리를 용상(龍床), 왕의 옷을 용포(龍袍), 왕의 얼굴을 용안(龍顔) 등 용으로 상징되고 신의 자리엔 호랑이 형상이 있듯이, 서양에서는 신이나 황제근처엔 항상 사자가 위엄 있는 형상으로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외진 곳에 있는 올림피아 박물관에도 항상 방문객들로 끊이질 않는다.
제우스신상이 바로 뒤에 헤라신전과 제단(Hera's Altar)이 있다. 이 헤라제단에서 최초의 올림픽 성화를 채화했다. 제우스신상이 있는 제우스신전, 헤라신전과 제단이 나란히 앞뒤로 있는 것이다. 태양으로부터 채화한 성화는 평화의 빛으로 올림픽 기간 내내 밝힌다. 조 박사는 “하늘의 빛을 인간이 사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불로 만드는 장소가 바로 헤라제단”이라고 설명했다. “헤라는 불의 여신으로, 자궁을 가지고 생명을 잉태해서 자손을 번식시키는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라며, 헤라신전 앞에서 성화를 채화하는 이유를 부연했다. “또 고대 사회는 자연과 더불어, 자연을 이용해서 사는 모습이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고 인간과 신이 둘이 아닌 모습이 동서양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고대 그리스 병사들이 썼던 헬멧.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에겐 월계수관이 수여됐다. 월계수는 나무다. 지금의 올림픽에서 우승하면 엄청난 금액과 명예가 주어지지만 당시엔 명예뿐이었다. 이는 올림픽 자체가 고상한 정신적 세계의 산물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금전적 혜택이 있었겠지만 공식적으로는 월계수관을 수여하는 게 전부였다. 고대 올림픽은 서기 400년 정도까지 계속됐지만 이후 중단됐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대규모 지진 때문에 중단됐다는 주장이 중론이다. 이후 1896년 쿠베르탱에 의해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 올림픽이 부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올림픽의 중심지가 올림피아에서 아테네로 옮겨간 것이다.
20세기 들어 과거 찬란했던 그리스 문화를 복원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현재도 진행형이다.
제우스신상은 고대사회 세계 7대 불가사의(seven wonders of the ancient world) 중의 하나다. 제우스상은 높이 약 12m의 목조로 건축된 것으로 전한다. 신전은 426년쯤 기독교의 신전 파괴령으로 부서졌으며, 6세기에 지진과 홍수로 땅속에 완전히 매몰됐다고 한다. 이후 19세기 초에 발굴이 시작됐고, 1950년 무렵에는 피디아스의 작업장이 발견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조각가인 피디아스(Phidias)는 BC 445년 제우스신상을 조각했다. 조각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시 ‘신들의 상 제작자’라는 칭송받았다. 그는 제우스신상뿐만 아니라 ‘아테나 알레아’ ‘아테나 파르테노스’ 등 유명한 신상은 전부 만들었다. 전문가들은 그의 작품을 단순․명료하면서도 개개의 감정을 초월한 높은 정신세계를 보여준다고 평가하고 있다. 참고로 고대사회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푸왕 피라미드,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의 공중정원,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능묘, 로도스의 크로이소스 대거상(大巨像),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파로스 등대 등이다.
올림피아에 과거 신전이나 건물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돌들을 주워 모으고 있다.
신전의 기둥들만 남아 있다.
올림피아 박물관에 주변에서 발굴된 많은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그리스에는 가는 곳마다 박물관이 있어 화려했던 과거의 모습을 일부나마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