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11.10 07:07
[5편의 시, 5권의 시집]

5편의 시, 5권의 시집으로 늦은 가을을 읽는다. Books의 이번 주 기획은 '詩, 만추를 읽다'. 정현종 유안진 곽재구 김민정 박준 다섯 시인이 또 다른 다섯 시인과 시집을 추천했다. 그들이 호명한 이름은 각각 정지용·김용택·공광규,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와 노르웨이의 울라브 하우게(1908~1994). 교보문고 집계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시집 판매는 거의 매년 10~30%씩 늘었다. 2010년에 비하면 올해 시집 판매량은 두 배다. 느리지만 점성 높은 사랑이랄까. 정확한 사색과 탄력 있는 리듬으로 시 읽는 가을은, 복되다.

뒷다리가 길어지는 시인들의 가을밤

파주에게
공광규 시집
실천문학사
142쪽|1만원
오고 있는 가을에 받은 시집을 가고 있는 가을에야 읽었다. 그만큼 우편물도 많고 일상도 괜히 분주한데, 그럴수록 심신은 더 자연에 목마르다. 도시인 누군들 아니 그러하랴.
이 시에서는 가을을 가을답게 해주는 가을의 식솔들, 시인이 시로서 불러주지 않으면 이름 얻지 못할 것들, 제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게 될, 작고 작아서 어리고 여린 것들이 다 호명(呼名)받아서 좋다. 메뚜기 귀뚜라미 풀여치 방아깨비에 감나무 뽕나무 백양나무 강아지풀… 이것들로 하여 가을다워지고, 기우는 가을 햇살 또 가을밤의 달빛도 찬이슬도 된서리도 고귀해진다.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 싶은 대로만 듣고 살면서 말이다. 못 보고 안 듣고 못 듣는 게 더 참인데도 말이다. 침묵에 가까워야 드러낼 수 있는 목소리들이 있어 그것이 더 詩이고, 눈감아야만 보일 듯한 목숨들이 진정한 시인들인데도 말이다.
금속성 시대의 시멘트 속 일상. 이렇듯 작아서 없는 듯한 그래서 오히려 향기 높고 고운 이름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주다니 너무 고맙다. 곤궁했으나 이들로 하여 풍요와 호사와 호강이 되었던 농경 시대도 있었다고, 그 시대의 그 계절도 뒤돌아보라고. 돌아보지 않는다면 인간이 어떻게 인간다워지랴. 정수리가 쪼개지도록 머리에 이고 등짝에 지고 가슴팍에 붙안고, 방아 찧고 키질로 까불어야만 먹고살았던 노동의 기억들은 현 순간을 얼마나 진솔하게 만들어 주는가.

작고 작아서 무존재나 다름없는 가을 풀벌레들, 그들의 뒷다리가 비로소 길어질 수 있는 가을밤인가. 비로소 다리 뻗고 쉴 수 있는 가을밤이 길어지는 이유가 이들의 앞다리 아닌 뒷다리라니, 절구(絶句)로 읽혔다. 가을에는, 더구나 가을밤에는 항상 푸대접만 받던, 앞다리에 끌려다닌 뒷다리를 쉬게 하자.
항시 열려 있어 독점하지 않고 함께 하는 귀, 귀의 계절 가을도 깊어져 길어지는 가을밤이다. 깊어지는 것이 높아지는 것이 되는 가을밤의 격조, 침묵 같은 목청을 나누며 함께 듣는다. 참 시인, 풀벌레들! 그들 목소리가 가슴 후벼 적시는 향기 높은 시와 시의 낭송인 것을.
신은 세상을, 시인은 내면을 창조했다

릴케 시 여행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집
정현종 옮김|문학판
164쪽|1만4000원
가을을 노래한 시라면 인류의 시적 유산을 통틀어 릴케의 '가을'과 '가을날'이 단연 압권일 것이다. 그의 모든 작품이 그렇지만, 이 가을 노래들은 세월과 시간의 침식을 벗어나 있으며, 되풀이되는 가을과 함께 되풀이해서 살아난다.
신이 세상(바깥세상)을 창조했다면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내면세계를 창조했다고 나는 쓴 적이 있지만, 이 작품에서도 보듯이 사물은 이 시인의 영혼에 사로잡히는 순간 즉각적으로 내면화된다. 예술 작품이라는 게 다소간 내면화 과정을 거쳐서 나오는 것이겠지만, 이 시인의 작품처럼 우리의 마음을, 일거에 모든 제한을 벗어나 무한 속에 노닐게 하는 작품은 드물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인간 활동이 만드는 바깥으로부터의 제한들과 자신이 스스로에게 채우는 족쇄 때문에 왜소해지고 비뚤어지기 쉬운 우리의 마음은 시적 체험을 해야 하는데, 그러한 마음 챙김은 우리가 항상 물을 마시듯 해야 하지 않을까.
'가을'은 물론 조락(凋落)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놀라운 것은 조락의 느낌을 점점 강하게 하는 이미지와 진술이다. 처음에 나뭇잎들이 떨어지는데, 단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저 먼 위에서인 듯' 떨어진다. 그다음에 지구가 떨어지고 우리 모두가 떨어지며 '여기 이 손도' 떨어진다. 그리고 다른 손들도. 그야말로 조락의 크레센도(점점 강하게). 그런데 그 떨어지는 것들이 낙하(落下)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낙하를 '한없이 조용하게'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누군가' 계시다고 하면서 조락을 성화(聖化)한다.

그 모든 과정은 보통사람이 못 보고 못 듣는 것들을 보고 듣는 시인의 비범한 능력이 빚어낸 것인데, 그러한 능력은 평생 시인의 영혼 속에서 움직인 '천사'의 '고요한' 권능이다. 릴케는 한 편지에서 '천사'에 대해 '보이지 않는 것 속에서 실재의 보다 높은 차원에 대한 인지를 보장'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이것은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인지 능력이기도 하고 인간 세상이 좀더 살 만한 곳이 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정신적 지향이기도 하다.
이 세상이 좀더 살기 좋은 곳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비원(悲願)이니.

시 다섯 편을 팔아 시집 한 권을 사다

초판본 정지용 시집
정지용 시집
그여름
168쪽|9800원
27년 전 가을날의 일이다. 지리산 피아골에 가기 위해 구례구역(驛)에 내렸다가 입성이 허름한 한 노인이 책 두 권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형편이 남루해 세간이나마 팔러 나온 모양이었다. 노인에게 다가가 그가 팔러 나온 책을 받아 펼쳤다. 순간 가슴이 뛰었다. 일제강점기 간행된 정지용의 시집과 산문집이었다. 시집 맨 뒷장 간기(刊記)에 '쇼와(昭和) 10년(1935) 10월 27일 시문학사 발행'이라는 문구와 발행인 박용철의 이름이 선명했다.
노인에게 값을 물었다. 정규 수입이 없던 궁핍한 시절 나는 시 다섯 편을 발표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을 치르고 시집 한 권을 샀다. '정지용 시집'과의 조우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시집의 첫 장에 젊은 날 노인이 새겼을지 모르는 메모 하나가 있었다. '지용, 너는 나로 하여곰 한갓(모든) 지상의 미(美)와 추(醜)를 다 경험하게 하였다.'

지용의 시에 대한 최상급의 찬사일 것이다. 이 시집 안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가 들어 있다. '호수'다. 불과 2연, 6행으로 이뤄진 짧은 시지만 이 시를 대할 때 내 가슴은 한없이 진지해지고 따뜻해진다. 대저 시란 무엇인가. 더 좋은 세상을 꿈꾸는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한없이 맑게 추스르는 인식의 담금질 아니겠는가. 일제강점기라는 혹독한 계절 속에서도 시인은 가장 순정한 인간의 마음을 버릴 수 없었고 그 꿈에 대한 그리움의 시간들이 궁핍한 현실을 이겨내는 힘이 됐을 것이다.
이 가을, 나는 섬진강을 따라 짧은 도보 여행을 하려 한다. 가방 안에 지용의 첫 시집을 넣을 것이다. 걷다가 소를 만나면 소에게 '향수'를 읽어주고 일찍 날아온 북국(北國)의 철새들에게 '호수'를 읽어줄 것이다.
모든 억압과 그리움에서 자유로운 이 시절, 지용이 나의 작은 사치를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나막신 신듯 쉬운 시라서 좋아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울라브 하우게 시집
임선기 옮김|봄날의책
104쪽|1만1000원
노르웨이 시인 울라브 하우게의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이 시집이 좋았다. 시집에 실린 서른 편의 시 전부가 좋았다. 현관에 놓인 나막신처럼 바로 신으면 될 만큼 쉬운 시들이라 좋았다. 새가 호수에서 물방울을 가져오듯 이슬처럼 작은 것을 보게 하는 시들이라 좋았다. 차향이 나는 티백 종이에 연필로 필사를 하게 만드는 시들이라 좋았다. 꽃 피고 벌떼 춤추는 봄날의 시들이 아니어서 좋았다. 다디단 피자두 볼 터지는 소리로 무장한 여름의 시들이 아니어서 좋았다. 헛간에 세워둔 사다리에 누군가 바구니를 거는 황혼 녘 가을의 시들이어서 좋았다. 멀리 빙하들이 새로 온 눈을 조금씩 모자처럼 쓰고 있는 겨울 직전의 시들이어서 좋았다. 이 좋은 시들의 시인이 평생 정원사로 일했다고 해서 좋았다. 한 손에 도끼를 든 채 매일 노동했고 그중 가장 좋은 시는 숲에서 썼다고 해서 좋았다. 어떤 병증도 없이 다만 열흘 동안 먹지 않는 옛날 방식을 택해 시인이 죽었다고 해서 좋았다. 그럼에도 지금껏 가을바람 소리를 들으며 여전히 숲에서 나의 길을 찾고 있다고 해서 좋았다.
"넓은 모자 아래 있으면 안심이 되죠"

비 오는 날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 서본 적이 있는가. 그러고는 한껏 목을 젖혀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는가. 혹여 참나무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소매로 나뭇잎을 닦아본 적이 있는가. 쉬운 게 나무라지만 나무처럼 어려운 게 없다. 다만 나무 그늘 아래 섰을 때 내가 느낀 안도에 대해서만은 아주 조금 알 것도 같다. 내다보며 기다리며 이해하며 우리 다 그렇게 나이 들어 왔거늘 우리 왜 다 내다봐 주는 일에 기다려주는 일에 이해해주는 일에 이다지도 인색하게 되었을까.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건 그만큼의 시간 동안 함께 비를 맞아 왔다는 말이기도 할 터, 그럼에도 모두가 비를 피할 때 빗속으로 뛰어드는 이 또한 있는 것이 인생이기도 할 터, 그래 오직 비 때문에 길가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 선 건 아니겠지?
감동·따뜻… 다른 말로 대체할 수가 없어

울고 들어온 너에게
김용택 시집
창비
100쪽|8000원
올 한해의 시간을 살아오면서 "해야 한다" 혹은 "하지 말아라"라는 말을 얼마나 더 들어야 할까. 의무와 당위, 강제와 금기 사이에서 길을 자주 잃게 되는 우리는 눈이 무겁고 발이 아프다. 눈을 잠깐 깜빡한 사이, 아픈 발을 부여잡는 사이 벌써 가을이 깊이 왔다. 물론 김용택 시인의 '쉬는 날'에도 해라투의 "쉬어라" "놀아라"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진다. 아마 이 말들은 시인의 나긋한 음성을 지나면서 "해도 된다" 혹은 "안 해도 된다"로 변주되어 들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오랫동안 인간이 맞이하는 깊은 가을날은 '쉬는 날'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농한기를 맞은 들녘처럼 스스로의 몸을 쉬게 하든,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간 산사의 스님들처럼 마음과 번뇌를 쉬게 하든지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가을에도 쉬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 짧은 시 하나가 더 깊숙하게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용택 시인의 시는 섬진강처럼 끊임없이 흘러왔다. 때로는 거세게 굽이쳤고 어느 순간에는 소(沼)처럼 스스로의 문학을 전복하고 갱신했다. 그리고 지금은 고운 모래밭을 지나는 유순한 강처럼 넉넉한 세계를 내어 보이고 있다. 김용택 시인의 작품은 무엇보다 감동적이고 따뜻하다. 나는 말에도 유통기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예를 들어 '웰빙', '힐링' 같은 말처럼 우리가 너무 자주 사용했던 말들은 일찍 그 기한이 다했다고 믿는다. 물론 방금 이야기한 '감동적이고 따뜻한 시' 같은 말도 상투적인 수사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이 말을 떠올리고 적는 까닭은 그의 시는 정말 감동적이고 따뜻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대체할 수 없다.
지난해 출간된 김용택 시인의 시집 '울고 들어온 너에게'를 곁에 둘 수 있다면 가을 너머에 있는 겨울도 그리 두렵지 않다. 아랫목에 넣고 되작거린 손처럼 따뜻한 시들이 꽝꽝 언 길을 헤매다 들어온 우리의 마음을 감동적으로 감싸줄 것이기 때문이다.